짧은 생각

가을을 맞이하며 - 시 모음

lluna 2021. 6. 5. 09:23

네이버 블로그에 2015. 9. 6. 작성했던 글입니다.

 

 

 

 

 

너무

세게 쥐었다

 

그땐

몰랐으니까

 

바람에

날릴까 봐

 

파도에

쓸릴까 봐

 

자두처럼

멍들었지

 

움켜쥐면

쥘수록

 

빈손

뿐이란 것을

 

바람에

흩어지는

 

모래를 보고

알았지




박장순, 사랑











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

그 무수한 길도

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.

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

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

네 머리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

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

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

사랑에서 치욕으로

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

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

그러나 매양 퍼 올린 것은

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

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

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

나의 생애는

모든 지름길을 돌아서

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.




푸른 밤, 나희덕












아가

오늘이 성년의 날인가 뭐신가 하드라

그래서 사방이 장미꽃 받는 청년들 뿐이여

 

아가

35년이 지나도 가슴 속 열 여덟으로 잠든

내 아가야

미안타, 올해도

엄마는 국화꽃밖에 주지 못하겄다.




오일팔, 서덕준











잊으라 했기에 당신을 잊으려 

시간아 흘러라 빨리 흘러라 그랬지요 

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흘러가면 잊힐 줄 알았지요 

그런데 시간마저 당신을 놓아주지 않더이다

사무치도록 그리워 가슴에 담은 당신 이름 세 글자 

몰래 꺼내기도 전에 눈물 먼저 흐르더이다 

 

당신 떠나고 간신히 

잊는 법 용서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 했는데

다시 찾아온 계절은  

누군가 몰래 맡기고 간 베르테르의 편지를 안겨주더이다 

 

당신을 사랑하던 봄 

지운 줄 알았던 당신의 흔적 

곳곳에 문신처럼 박혀있더이다

 

잊으라 해서 잊힐 줄 알았던 에로티시즘 

다시 찾아온 봄과 함께 전신으로 번져가더이다 

가늘게 떨리듯 호흡하는 목소리가 아직도 익숙한데  

잊으려 하니 그제서야 꽃이 피는데 

나 어찌합니까 




잊으려 하니 꽃이 피더이다, 김정한











오늘따라 유독 허기가 졌다

황홀을 먹고 싶었다

낭만 실조에 걸린 것 같았다

날 보고, 네가 웃었다

포만감에 숨 쉬지 못했다




낭만실조, 이훤












겨울이었어

네가 입김을 뱉으며 나와 결혼하자 했어

갑자기 함박눈이 거꾸로 올라가

순간 입김이 솜사탕인 줄만 알았어

엄지발가락부터 단내가 스며

나는 그 설탕으로 빚은 거미줄에 투신했어

네게 엉키기로 했어 감전되기로 했어

네가 내 손가락에 녹지 않는 눈송이를 끼워줬어

반지였던 거야

 

겨울이었어

네가 나와 결혼하자 했어.




오프닝 크레딧, 서덕준












어머니는 죽어서 달이 되었다

바람에게도 가지 않고

길 밖에도 가지 않고

어머니는 달이 되어

나와 함께 긴 밤을 같이 걸었다




사모곡, 감태준

 

출처: JJUCKBBANG CAFE